Big Moment_20120925▶20121006_갤러리담

<개인전>
갤러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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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경향의 추상적 불화 ● 홍지의 작품은 채색된 실을 쌓아올리고, 다시 그것을 흐트러뜨리는 두 작업의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같은 연도에 전시된 두 차례의 개인전 『虛虛실실(2011.7.23)』과 『nihil in mundo(2011.12.17)』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작품들은 뚜렷한 형태를 띠고 있지 않고, 흩어지는 형태 속에서 색체의 발산만이 표현되어 있다. 대다수의 작품은 타이틀이 붙어있지 않고, 붙어 있다고 해도 삼각형이나 육각형 등의 도형의 이름이나 찰랑찰랑 등의 의성어가 대부분이다. 뚜렷한 테마를 나타내는 타이틀은 아닌 것이다. 물론 zen for line과 같이 주제를 암시하는 타이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작품 중에 두 점에 해당할 뿐이기 때문에, 타이틀만을 가지고 작품의 일관된 테마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홍지의 작품세계는 타이틀과 작품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작품의 표현물과 작업의 관계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굳이 작품만이 아니라 작업을 검토해야 하는 까닭은, 작품에서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형태의 해체가 미리 전제된 기획 하에 이루어진 페인팅의 결과물이 아니라, 작품 틀에 촘촘히 묶여진 실에 채색을 하고, 다시 풀어서 묶고 다시 채색을 하고 풀고 묶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홍지의 작품은 일회적인 페인팅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과연 얼마나 다른가? 어차피 처음부터 형태를 흩뜨리는 방식으로 페인팅을 하나 수차례 실을 묶고 푸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나 결과물이 비슷하다면 헛수고가 아닌가?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작품 속에서 작업의 반복은 결과물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형태가 해체되는 불연속적 단면들을 보여준다. 작업의 반복으로 말미암아 형태들의 흩뿌려짐은 연속적인 느낌이 아니라 뚝뚝 끊어진 모습으로, 마치 디지털 모니터의 픽셀들처럼 불연속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불연속적 느낌은 『虛虛실실(2011.7.23)』에서 『nihil in mundo(2011.12.17)』로 가면서 더 강해진다. 특히 『nihil in mundo(2011.12.17)』의 「untitled 30×30」은 「찰랑찰랑」과 같은 이전의 전시된 작품들에 비해 굵은실을 사용함으로서 반복적 작업이 만들어내는 불연속적 단면들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불연속적 단면들이 뚜렷해질수록 작업의 흔적은 강하게 남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작업을 강조하고자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는 홍지의 이력이 불화 작업에서 시작했음을 염두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불화 작업의 영향은 홍지가 자신의 작품을 모래만다라에 비유한다거나, 작품의 테마를 생성소멸의 과정으로 소개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실을 감고 푸는 수고스러운 반복 작업은 불화를 제작하는 고된 반복 작업의 변형된 형식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불화에서의 반복 작업이 불교의 가르침인 공(空)을 깨닫기 위한, 즉 마음을 비우기 위한 수행의 과정임을 생각해보았을 때, 홍지의 작업 역시 수행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오히려 실을 한올 한올 묶고 풀면서 고정된 상은 없다는 것을 직시하는 홍지의 작업은 불교의 가르침에 너무나도 충실해 보인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작업과정이 수행을 의미하고 표현된 결과물이 고정된 상의 해체를 의미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표현과 작업이 실이라는 질료로 이어지면서 어떤 일관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았을 때, 홍지의 작업을 불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실이라는 기존의 불화에서 잘 쓰이지 않은 소재를 사용했다는 점과 흩뿌려진 형상이 기존의 불화라는 코드에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찰에 배치된 불화로부터 탈영토화 된 불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현대 불교미술에서 사찰에 배치된 불화와 무관하게 불화로부터 소재와 형태를 빌려와 변형시킨 작품들은 많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은 만다라나 연꽃, 붓다 등의 불교적 도상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불화로부터 온전하게 탈영토화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반면 홍지의 작품에는 초기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불화에서 자주 쓰이는 도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심지어 「untitled 72.7×60.6」은 흰색과 검은색만을 사용하여 색체마저도 기존의 불화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으로 판단컨대 홍지의 작품은 '추상적 불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인 공을 표현하면서, 그 표현되는 과정을 수행으로서 실천하는 점에서 불화라고 명명할 수 있지만, 그 결과물이 기존의 불교적 표상을 재현하지 않는 방식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추상적이라고 덧붙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홍지의 작품에서 불교를 떠올린 만한 어떤 재현적인 요소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작품이 만들어내는 형과 색의 흩어짐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성소멸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불교적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추상은 내용을 지우고 형태만을 남기는 공허한 추상이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인 공을 견지하되 표현적 차원에서 상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좀 더 불교적인 의미에서의 급진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조지훈


Abstract Buddhist Paintings with Radical Tendency ● Hongzi's works are the products of two repetitive tasks -piling up colored threads and breaking them up again. As shown in her two solo exhibitions, 『Heoheosilsil(23.07.2011)』 and 『nihil in mundo (2011.12.17.)』, in the same year, her works do not have a distinctive form, yet express only the diffusion of color in the dispersive form. Most of her works have no title. Even though they have the titles, the titles are mostly the names of figures such as triangles and hexagons or the onomatopoeia such as Chalangchalang. They do not have distinctive themes. Of course, some titles such as 'Zen for Line' imply the subjects, yet only two of her many works have such titles. Thus, it is difficult to find the consistent themes based on the titles only. The clues to the world of Hongzi's works need to be discovered in the relation between the expression and the works, not in the relation between the titles and the works. The reason why there is a need to review her work process as well as her works is because the breakup of forms shown in general in her works are the products of the paintings based on the presumed planning, but the products from the repetitive process-coloring threads densely tied to the frame of work, untying and tying again, coloring again, and tying again. Hongzi's works are not accomplished by painting once. This raises one question. What difference does the products created in that way make? If the products are the same no matter whether they are painted in a way of breaking up the forms from the beginning or making in a way of tying and untying threads several times, won't it be a vain attempt? It is no true, because the repetitive task is not associated with the products, but shows discontinuous cross-sections dismantling the forms. Owing to the repetitive tasks, the scattered forms give a discontinuous feeling like the pixels of a digital monitor in the broken forms. This discontinuous feeling of forms becomes more stronger from 『Heoheosilsil(23.07.2011)』 to 『nihil in mundo (2011.12.17.)』. In particular, 『Nihil in mundo (2011.12.17)』 「untitled 30×30」 shows the discontinuous cross-sections by the repetitive tasks using thicker thread than her previously exhibited works like Chalangchalang. As these discontinuous cross-sections become distinctive, the traces of her task remain strong. ● If so, what is the reason why the task needs to be emphasized? It is needed to consider that the career of Hongzi started from her Buddhist painting. Furthermore the effect of her career as such appears strongly as shown in her comparing her works to sand mandala or her introducing the themes of her works as the process of generation and extinction. If it is the case, it will be no problem to say the laboriously repetitive work for tying and untying threads is the transformed form of the laboriously repetitive work for producing Buddhist paintings. When considering such repetitive work is the process of practicing asceticism to empty the minds, there is no reason not to say Hongzi's task is also an another form of asceticism. Hongzi's task facing the fact there is no fixed form, tying and untying threads one by one, looks to be so faithful to the teachings of Buddhism. ● As mentioned earlier, if the work process means asceticism and the expressed products mean the breakup of fixed forms and if it is considered that such expression and works form a certain consistence through substances called threads, Hongzi's works can be called Buddhist Paintings. Hongzi's works, however, can be called Buddhist paintings deterritoralized from the Buddhist paintings in temples in that he uses the materials which were not used normally in the previous Buddhist paintings and the points and the scattered shapes do not match the code of the existing Buddhist Paintings. Of course, there are many works which are transformed by borrowing the subjects and shapes from Buddhist paintings irrelevantly to the Buddhist paintings in temples. However, it is difficult to say those works are completely deterritoralized from the existing Buddhist paintings because they use Buddhist iconography such as lotus and Buddha. However, in Hongzi's works except a few works in the early stage, no Buddhist iconography used frequently in the existing Buddhist paintings. Furthermore, her work 「untitled 72.7×60.6」 used only white and black color only, indicating even colors deviate from the existing Buddhist paintings. Judging from this tendency, Hongzi's works can be called 'Abstract Buddhist paintings. Her works can be called Buddhist paintings in that they express 'void' a teaching of Buddhism, while practicing the process of expression as asceticism. However, it is needed to add 'Abstract' to her works, because her works are composed in the way that does not represent the symbols of the existing Buddhist paintings. We cannot discover any reproductive elements that remind us of Buddhism in Hongzi's works. We can see the Buddhist attributes in her works, because the shapes and the scattered colors in her works make people feel the meaninglessness of generation and extinction. Thus, this abstraction has more radical tendency in Buddhist significance in that it pursues 'void' a teaching of Buddhism, yet destroys the figures in the aspect of expression rather than deletes the contents and leaves only shapes. ■ CHOJI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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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기호_20150227▶20150312_예술지구p  
Big Moment_20120925▶20121006_갤러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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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虛.실.실_20110723▶20110803_갤러리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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